유정옥 (인일여고 12회졸업)
인일여고 2학년 때이니
31년전의 아련한 일이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길
어머니는 새벽기도 가기전
나를 학교에 바래다 주고 교회로 가시곤 했다.
그 날 학교 교문에 거의 다달았을 무렵
나는 한 남학생이 전봇대 밑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무심코 교문을 들어왔지만
하루 종일 그 소년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 생각의 끝은 혹시 나를 기다린 것이 아니었을까로 진전이 되었다.
그 이튿날은 내가 먼저 그 곳을 유심히 보았다.
키가 큰 그 학생은 그 날도 여전히 그 곳에 서 있었다.
삼일째 되는 날엔
어머니와 같이 가지 않고
나혼자 등교하였다.
조금 더 멀리서도
그 학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렇게 심장이 뛰는지
쿵쿵! 소리가 새벽길을 울리고 있었다.
심장의 박동은 빨랐지만
그 곳에 가까이 갈수록
나의 발걸음은 천천히 가게 되었다.
그가 그 곳에 서 있는 이유를
나에게 말하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무심한듯 그 곳을 지날 때.
"저 저좀 보세요."
그 학생이 드디어 말을 건냈다.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뒤돌아 보았다.
"저 여기서 여러날 기다렸어요.
그렇게 앞만 보고 다니시네요.
눈길 한 번 받는 데 보름이 다 되어가요.
그렇게 앞만 보고 다니지 말고
가끔은 눈길을 받고 싶어
주변에 서성이는 사람이 있나 둘러도 보세요.
시낭송하는 것을 듣고 부터
만나고 싶어서
이름도, 집전화번호도 알아보았어요.
많이 당혹스럽겠지만
이렇게라도 안하면
난 요즈음 공부를 전혀 할 수 없어요."
띄엄띄엄 말을 이어가는그는
불량해 보이지 않고
진실되어 보였다.
어쩌면 그가 제고 교복을 입고 있어서
나에게 믿음을 더 주었는지 모른다.
이럴때 어떻게 해야하나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이 학생이 3학년이라는 것과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나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그럼 내일 다시 한 번 만나서 말씀드릴께요.
" 하고는 황급히 교문으로 들어섰다.
큰 바위 덩어리가 가슴을 누르는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안절부절 고민을 했다.
아무런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담임선생님께 상담을 했다.
선생님은 그 학생도 나도 학업에 열중하려면
내일 그 학생을 만나
"대학에 붙으면 만나준다."고 하라는 것이었다.
그 이튿날
나는 그 학생에게 선생님이 일러준대로 말했다.
그는 너무나 기뻐하며 단숨에 학교 앞 언덕 길을 내려갔다.
그 학생은 더이상 그 곳에 서있지 않았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깊어지던 날.
까맣게 잊고 있던 그 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학에 붙었으니 만나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때는
내가 예비 3학년이었고
입시 준비에 대한 무거운 부담을 안고 있을 때였다.
그렇지만 약속을 해놓았으니
약속은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를 만나서 대학에 합격한 것을 축하해 주었다.
그는 자신이 대학에 합격할 수 있게
약속해 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나는 이번엔 "내가 대학에 합격해야 만날 수 있겠다."고 말했다.
그는 내 말에 선뜻 공감했다.
그는 봄부터 대학 생활을 시작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여학생들과 만나는 기회도 많아질 것이니
저절로 나를 잊을 수 있을 것이고
혹시 1년을 더 기다리고 있다면
그 때는 그를 만나도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3학년이 되었다.
그 때 우리 학교는
무감독 시험과
복도 끝에 학용품 무인 판매를 실시했다.
인일이 아니면 절대 불가능한 자랑스런 제도였다.
아침 6시 40분에 수업시작
밤 9시 30분에 수업이 끝났다.
통금이 있었던 그 때에도
우리들은 밤 11시가 넘도록 도서실에서 공부를 했다.
월요일 마다 전과목 시험이 있었다.
봄부터 시작된 강훈련의 입시 공부 속에서
지치고 지쳐가던 6월의 어느날.
그 학생의 어머니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2월말 부터 급성 장암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죽음을 눈 앞에 둔 아들의
마지막 소원이니 지금 병원엘 가자는 것이었다.
고운 얼굴에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시면서 부탁하셨다.
나는 담임 선생님이셨던
임순구 선생님께 말씀을 드렸다.
선생님의 조퇴 허락을 받고
그 학생의 어머니를 따라 기차를 탔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
수많은 호스들이 얽히어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무어라고 얘기하더니
간호사가 오고
의사가 오고
무언가 급한 의논이 있는 듯 하였다.
그러더니 얽히어 있던 호스들을
다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 일을 하는 동안 나는 병실로 들어가지 못했다.
"어때?
이젠 하나도 안무섭지?"
네가 나를 보고 겁먹을까봐
간호원 누나에게 호스를 다 빼달라고 했어."
"나 조금도 겁나지 않았어요."
나 때문에 호스를 빼서 이 학생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봐
사실은 더 겁나고 있었다.
"공부 열심히 했니?
나하고 약속한 것 지킬 수 있겠어?
나는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끄덕 했다.
"나 너에게 한 가지만 물어볼께.
나하고 약속한 것 너의 진심이었니?
혹시 그 때 나를 거절하기 위한 핑계는 아니었니?
그의 진지한 물음에 나도 모르게
"진심이었어요." 라고 대답했다.
"그럼 너도 나 보고 싶으면서도
공부하느라 꾹꾹 참았겠네."
이 물음엔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이제 죽음이 두렵지 않아.
행복하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애.
단 한 가지
너에게 약속한 것 내가 못지키게 된 것 미안할 뿐이야.
이건 불가항력적이었으니 용서해라.
대학에 꼭 합격해라.
너와 약속한 날짜는 안되었지만
죽기전에 꼭 한 번 보고 싶었어.
" 내가 대학에 붙으면 만나 주겠다고 약속한
그 첫날처럼 밝게 웃으며 나를 보내는
그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입안에서만 뱅뱅 돌았다.
며칠 후
그의 어머니의 오열하는 목소리가 들렸고
그의 동생이 오빠가 죽음을 행복하게 맞이했다고 전화해 주었다.
그 학생은 그 날부터
내 인생의 그 곳에 서 있다.
영원히 늙지않는 제고 3학년의 모습으로
내가 앞만 보고 달려갈 때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가지 말고
너의 눈길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나
너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나 주변을 둘러보라."고
나의 분주한 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는 우리 인생의 길이 언제나 달려야만
전진하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서는 것이
곧 전진하는 것임을 나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날 그 병실에서
얼떨결에 한 나의 대답이
그를 행복하게 할 수 있었다면
그와의 약속은 지켜진 것으로 믿고 싶다.
그 후에 나는 다른 사람들과의 약속은 진지하게 했고
대답은 항상 진실이여야 했다.
그 학생과의 짧은 만남은
그 학생과의 긴 이별은
나에게 성공하는 삶이 아닌
가장 가치있는 삶을 살고 싶어하게 했고
그것은 내가 신학의 길을 걷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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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이숙 ( 2004-02-22 05:31:55 )
얼마나 시리웠을지.... 얼마나 먹먹했을지...
선배님이 빠졌을 엄청난 혼돈을 상상해봅니다.
그 곳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영혼이 영글고
다시 그토록 빛나는 길로 들어섰던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11.전영희 ( 2004-02-22 08:48:34 )
드라마가 따로 없군요
이런 이야기는 드라마로서 있을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되곤 했었는데
실제 이야기일 수 있군요
설레임이 스치고 지나간 뒤에 아스라한 아픔이
한편의 동화로 승화된거 같습니다
10유옥자 ( 2004-02-22 09:58:11 )
아무말도 할수가 없군요...
주님의 ...
11.강명희 ( 2004-02-22 11:15:16 )
자꾸 눈물이 나려는 것은 날씨 탓일까요?
저리 아프고 슬픈 이야기를 이토록 담담하게 써내려갔군요.
그냥 아련한 로멘스에서 끝맺을 줄 알았는데....
그곳에 서 있었던 제고 학생이
하늘나라에서
아픔을 더 큰 사랑으로 승화시킨
정옥님을 지켜보고 있을 것입니다
14.정봉연 ( 2004-02-22 11:51:17 )
선배님같이 아름다운 분을 사모했던 그분 행복했을거라 상상해봅니다.
지금 주변의 모든 분들에게서 사랑받는 선배님 부럽습니다.
저 또한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11.안광희 ( 2004-02-22 12:08:08 )
눈물이 자꾸 납니다.
너무 아름다워서.
그 학생, 정옥후배, 엄마, 동생,담임 선생님 모두 아름답습니다.
제고15.이준선 ( 2004-02-22 14:30:06 )
제고넷 개편 축하차 들러주신 전영희 님의 안내로 오랫만에 여기 와 봤습니다.
제목에 '제고'가 있어 무심코 열었는 데 이런 슬프코도 아련한 이야기가 있군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행복하세요!
14.최인옥 ( 2004-02-22 17:30:16 )
에구~ 슬퍼라. 오늘도 울게 하시는군요.숙대에 계시는 이인복 교수님이 쓰신 글의 내용중 자신의 가족에게 성경과 먹거리, 담요등을 남겨주고 간 미군의 죽음 댓가로 당신 가족이 살아 난거라고 하시더군요. 제 소견으론,그 제고 학생의 죽음이 선배님께 무한한 사랑의 실천으로 살아있나 봅니다.
11강명희 ( 2004-02-22 18:16:01 )
유정옥 후배는 딴 나라 사람처럼 느껴졌는데
임순구 선생님반이였다는 소리를 들으니
이제야 동질성을 느낍니다.
저도 4반 임순구선생님반이였습니다
유진숙 ( 2004-02-23 10:31:44 )
우리 학교에 12회 선배님이 두 분 계세요. 최인효 선배님과 임명선 선배님 나도 선배님 글 빨리 읽어 보라고 내가 홈피 들어 온 다음 날 말씀 드렸어요. 하고 픈 말 많지만 지금 그저 보고만.... 너무 사랑이 넘치는 분.그 분은 고등학교때도 주님을 무척 사랑 하는 선배 였데요. 선배님 나도 '유사모'에 들랍니다.
14.유진숙 ( 2004-02-23 10:37:53 )
아이쿠 ! 동기들 게시판만 넘나들다보니, 선배님들 후배님들 안녕하세요. 기수를 빠트렸어요.
14이인희 ( 2004-02-23 11:10:56 )
선배님의 글 얼마 전 대략 한꺼번에 읽고 얼마나 울었는지요.....
친정어머니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요...
강퍅한 제 맘을 많이 돌아보게 하시지요.
선배님,
계속 홧팅입니다...샬롬
제고 17.조선호 ( 2004-02-24 17:18:27 )
'보고싶은 얼굴' 노래 배경음악으로 글을 제고넷에 실어주셨으면 어떨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진한 감동을 주네요.
주님과 함께 모닝커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