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는 성냥이다. 하나의 단어로 촉발된 인지반응은 해당 단어와 인접한 기억정보들을 연쇄적으로 점화시킨다. 가령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의 뇌는 캐롤·산타·선물·트리·카드 따위의 연관 정보들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린다. 우리의 뇌는 단어가 점화한 정보들이 가리키는 방향에 맞추어 생각하기 쉽다.
단어가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은 단어 하나만 바꾸어도 같은 것도 다르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한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은 보증기간을 ‘36개월’로 표기하면 ‘3년’으로 표기했을 때보다 더 길게 느낀다. 단위 때문에 숫자만 바뀌었을 뿐인데 36이 3보다 크기 때문에 같은 것을 다르게 느끼는 것이다.
‘점화효과’는 특정 단어를 인지하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발생한다. 이는 우리의 뇌가 점화효과를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누군가 고정관념과 결부된 단어를 눈 앞에 슬쩍 두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 한 연구에 의하면 동일한 게임이라도 ‘월스트리트 게임’이라고 했을 경우에는 ‘커뮤니티 게임’이라고 했을 때보다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이 게임 상대자에게 휠씬 비협조적이었다. ‘월스트리트’라는 단어는 무의식적으로 ‘경쟁’이라는 정보를 점화시키는 반면, ‘커뮤니티’라는 단어는 ‘협동’과 관련된 정보로 쉽게 점화되기 때문이다.
단어는 행동에 즉각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또 다른 실험연구에 의하면, 세계적인 자동차 경주 선수인 ‘미하엘 슈마허’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실험 참가자들이 말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점화효과가 생각과 감정을 넘어 즉각적인 행동반응까지 유도한 것이다.
무의식 중에 발생하는 점화효과를 고려하면 e메일 주소를 만들 때도 신경 써야 한다. 네덜란드에서 진행된 연구에 의하면, 이력서에 기재된 가벼운 e메일 주소는 인사 담당자에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 가벼운 느낌을 주는 e메일 주소로 인해 인사 담당자들은 무의식적으로 구직자가 가볍고 진지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첫인상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점화효과를 잘 활용하면, 단어 하나만 바꾸는 것만으로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가령 병원에서 입원 환자의 자존감을 세워주는 호칭만 바꾸어도 환자들의 회복 의지에 도움을 준다. 서울 소재의 한 병원에 입원 중인 노인 2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결과, 환자들은 과거 전성기 때의 직함(교수님·대령님·사장님 등)으로 불러주는 것을 좋아했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젊은 시절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이었거나 전문직에 종사했던 노인 환자들에게서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또한 적절한 단어 선택은 갈등 해결에도 도움이 된다. 미국에서 중년 이상의 부부 154쌍을 대상으로 결혼 생활 도중 생기는 갈등과 대화 내용 사이의 상관관계를 분석하였다. 부부간의 갈등으로 싸우더라도 '우리' 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면 문제가 더 잘 해결되었다. 반면 개인성을 강조한 호칭(나·너)을 많이 사용하는 부부들은 나이가 들수록 결혼생활을 불행하게 느꼈다.
사회적 논쟁에서는 유리한 고지 점령을 위한 단어전쟁이 쉽게 발생한다. 요금인상을 둘러싼 논쟁에는 ‘요금 현실화’ 대 ‘요금 폭탄’이, 낙태와 관련된 논쟁에는 ‘임신 중절’ 대 ‘태아 살인’이 단어 전쟁을 벌인다. 커다란 산불도 결국 작은 불씨 하나에서 점화된다. 단어는 하나의 성냥에 불과하지만 생각 전체로 쉽게 옮겨 붙는다. 당신의 생각을 점화한 성냥은 무엇인가.
[출처: 중앙일보] [최승호의 생각의 역습] 생각을 점화하는 ‘단어’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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